자가채종한 씨앗으로 루꼴라를 기르고 있어요. 자가채종이란 씨앗을 사서 쓰지 않고 다음해에 쓸 씨앗을 내가 직접 받는 걸 뜻하죠. 450~600평 정도 짓는데, 한여름에는 병충해도 심하고 작물 자체가 더위에 약해서 봄가을 위주로 해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그러니까 2000년 전후에 종자주권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직접 채종할 수 있는 농사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재래종이나 토박이작물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심어보던 때인데,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던 채소라면서 루꼴라 씨앗을 가지고 왔어요. 제가 농사를 짓고 있으니까 저한테 좀 길러달라고 하더라고요.
한두 평 되는 땅에 심고 채종하는 걸 반복하면서 15년 정도 길렀어요. 그동안 그 친구만 열심히 뜯어다 먹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살림 사무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혹시 루꼴라를 기르는 사람을 아느냐고요. “내가 계속 길러 왔고 채종도 하고 있다”고 했더니 물품으로 공급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공급한 지 올해 7년쯤 됐네요.
멀리서 온 씨앗이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낯설었겠죠? 처음에는 하우스 안에서만 자라고 겨울을 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땅에서 기른 루꼴라 씨앗을 받아 심고 하다 보니까 지금은 냉이처럼 로제트(짧은 줄기에 붙은 잎들이 땅 위에 퍼져 무더기로 나는 그루) 형태가 되고 빨갛게 색이 변하면서 겨울을 나더라고요. 우리 풍토에 적응한 거겠죠. 씨앗도 늦가을에 심어서 겨울을 난 게 좋고요.
↑ 2015년 늦가을, 잎이 붉게 변하며 땅에 납작하게 붙어 겨울을 난 루꼴라. 이듬해 왕성하게 자라서 튼실한 씨앗을 준 첫 월동 루꼴라였음
파종하고 수확할 때까지 기간이 제법 길어요. 겨울에는 70일, 봄가을에는 50일 정도 길러야 수확할 수 있어요. 냉랭한 날씨에는 한 번 심어놓으면 한두 달 가까이 수확할 수 있지만, 더워지면 한 달도 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못해도 1년에 7~8번은 파종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채소와 마찬가지로 루꼴라도 더위나 추위를 겪으면 꽃대를 만드는데, 그러면 이파리 상태가 안 좋아져요. 마침 요즘 한창 꽃대가 많이 올라와서 공급을 잠깐 중단하고 있습니다.
함께 공급하는 어린루꼴라는 ‘와일드 루꼴라’라는 품종으로 일반 루꼴라와 씨앗도, 생장과정도 아주 달라요. 루꼴라 씨앗이 깨 씨앗의 1/5밖에 안 될 정도로 크기가 작은데, 와일드 루콜라 씨앗은 루콜라 씨앗의 1/10 크기로 정말 작죠. 2년째 채종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렇게 작은 씨앗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건지 잘 안되더라고요.
예전에는 어떤 작물이든 다 자가채종을 했죠. 농사가 산업화되기 이전,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1950~60년대까지는 씨앗 자체를 팔지도 않았으니까요. 자급자족 농사를 하다 보니 집집마다 직접 씨앗을 받았고, 그게 재래종이나 토박이작물인 거죠. 그러다가 농업이 상업농 형태로 변하면서 한두 가지 경제성 있는 작물을 선택해서 생산면적을 늘리는 농사로 바뀌었어요. 그 과정에서 씨앗도 농부가 직접 채종하기보다는 종자회사에서 대량 생산하는 걸 사서 쓰게 된 거고요. 지금은 자가채종이 낯선 일이 됐지만 사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농사방식이에요.
저는 20년 남짓 자가채종을 하면서 재래종이나 토박이씨앗 농사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조선오이, 검정찰옥수수, 흑수박, 울타리콩, 개구리참외, 재래종 고추와 파 등 다양한 토박이 작물을 길러 한살림에도 공급했었죠. 한살림에 이러한 농사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져왔는데, 우리 생산자들이 못한 측면도 있고 정책적으로도 뒷받침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참 많이 아쉽더라고요. 재래종이나 토박이 작물 농사를 해보려고 하는 분들이 주변에 생겨날 때면 기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지만 아직 좀 부족하다고 느껴요.
농부들이 더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점점 지치고 늙어가는 농촌을 애정을 갖고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 농업과 농촌은 버티기가 너무 힘든 게 현실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현실은 갈수록 악화되는 느낌이고요. 우리가 이렇게 얼굴도 못 보고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농업은 네 일, 내 일이 아니고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공동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농부들에게 힘을 많이 북돋아 주시면 좋겠어요.
20년 넘게 루꼴라를 길러보니 느끼한 맛, 고소한 맛, 매운 맛, 씁쓰름한 맛 등 맛이 아주 다양하더라고요. 또 햇빛양과 땅의 성질, 기온에 따라서 어떤 맛이 강해지거나 약해지기도 하고요. 좀 춥게 자랐다 하면 톡 쏘는 맛이 강해지고, 요즘처럼 꽃대를 올릴 무렵이면 씁쓰름한 맛이 강해지는 것처럼요.
제가 루콜라가 맛있다고 느낀 건 씨앗을 준 친구 덕분이에요. 루꼴라를 후추, 소금, 올리브유 세 가지만으로 만든 드레싱에 버무려 내줬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또 루꼴라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에 넣어 먹으면 느끼한 맛을 잘 잡아줘요. 특히 라면에 몇 줄기 넣으면 국물 맛이 아주 달라지니 한번 시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