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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살림이야기

제 때를 알고 기다림이 먹거리의 기본

2019.02.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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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게 낀 연무로 풍광은 빛을 잃었다. 겨울티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2월 끝자락의 어느 날, 강화도 내가면에 자리한 자연주의 음식점 산당을 찾았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석모도 절벽이 산당에 걸린 풍경화인 양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2016년 문을 연 산당은 임지호 요리사가 양평과 서울 청담동을 거쳐 안착한 세 번째 식당이었다. ‘마음을 두고 정착할 만한 곳.’ 강화는 임지호 요리사에게 그런 장소였다.
“강 여섯 개가 합수하는 곳이라 민물과 바닷물이 조화롭게 어울려 있고, 식물이나 물고기 종류도 굉장히 다양해요. 물이 빠지면 몇 km씩 뻗어 나가는 뻘도 있고, 맞은편 석모도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죠.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가지고 있는 데다 북한하고도 가까우니 남북통일이 되면 더욱 의미 있는 땅이 될 거예요.”

단순히 맑은 공기와 좋은 풍광 때문이겠거니 하고 물었는데 생명과 자연, 치유와 통일까지 아우른 대답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평생을 떠돌아다녀 방랑식객(放浪食客)으로 더 유명한 그가 정착을 결심한 곳이기에 주변이 새삼 달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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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만큼이나 그림에도 관심이 많은 임지호 요리사가 한살림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한살림 사람들이 모여 영혼을 살찌우는 빛을 만들어내는 의미가 담겼다.


먹은 생명에 책임지는 삶

열한 살에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다 한식집, 요정,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에서 닥치는 대로 먹고 일하며 요리를 배운 지 벌써 50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요리라는 외길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는 임지호 요리사는 그 이유를 ‘감사에 보답하기 위해’라고 설명했다.

“위장은 만물의 무덤이에요. 우리가 평생 먹는 쌀이 몇 가마니고, 소 닭 돼지는 몇 마리일까요.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나를 위해 제 목숨을 내준 생명들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내 위장에 자기를 묻은 존재들에게 부끄럽지 않겠지요.”

그는 책임을 다하기 위한 방편으로 ‘요리’를 선택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내 앞에 찾아온 생명을 받아 다른 생명의 영혼을 살찌우는 밥상을 만들어 왔다. 그가 차리는 밥상이 제 모습대로 살아 숨쉬는 자연을 닮은 이유다.

감사의 대상은 자기를 희생한 생명들만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 위장에 오기까지 수고한 이들이 차고 넘친다. 땀 흘리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키우는 이들, 가족을 생각하며 더운 불 앞에서 요리하는 이들 모두가 감사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인구가 많아지고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서, 이윤에 눈먼 이들이 농약을 뿌리고 유전자조작하는 등 먹거리를 더럽히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생산량이야 늘어나겠지만, 부풀려진 허물이 먹는 이에게 이로울 리가 있나요. 고생해서 키운 것을 보면 정성이 읽혀요. 그들을 존중하고 노고의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인프라를 잘 만드는 것이 한살림의 역할이고, 못생긴 작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골라 정성껏 요리해 밥상을 차리는 것은 소비자의 책임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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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때를 맞은 것이 이롭습니다

요즘만큼 먹거리가 풍성해지고 먹는 방법이 주목받은 때가 또 있었을까. 텔레비전에는 먹방이 난무하고,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도 세계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많다. 자기 때를 알고 먹는 것, 그리고 그때를 기다려 먹는 일이다.

“우리나라 식문화에서 중요한 틀이 4계절, 24절기에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절기마다 다른 이벤트가 필요해요. 겨울 동안 뼈를 튼튼하게 하는 구근류와 해독 효과가 있는 묵나물을 먹고 봄이 되면 새싹을 먹는 등의 일이죠. 냉이나 씀바귀를 직접 캐봐도 좋고, 모내기나 벼 베기 같은 농사체험을 하는 것도 잘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죠.”

작물의 제철이 매년 달라지고, 4계절 내내 먹을 수 있는 한철 작물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지금, 때에 맞게 먹는 제철 먹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고루해 보이진 않을까.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제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생산자건 소비자건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다보니 제철을 기다렸다 먹었을 때의 기쁨도 모르고, 소중한 것에 대해 고마워할 줄도 모르게 되었으니 참 아쉬워요. 기후변화의 영향이 있더라도 절기와 제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제때가 중요한 것은 비단 제철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요리할 때 제때를 기다리는 것도 포함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맛이 들고 있으니 진득하니 기다리는 자세도 중요하다.

“열 시간 끓여야 할 것을 다섯 시간만 끓여서 내면 맛이 정리되지 않아요.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화학조미료와 합성첨가물을 넣는데 좋을 리 없죠. 가축을 키우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성장촉진제를 먹이고, 농약을 뿌리면 키우는데 드는 품과 비용은 줄어들지 몰라도 제대로 된 먹거리가 되지 않겠죠. 생산과 소비, 요리와 취식 등 모든 과정에서 때를 알고 기다리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일의 기본이 아닐까요.”

글 김현준 편집부 사진 최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