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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살림이야기

모든 이야기가 일상 속 만남에서 태어납니다

2019.01.2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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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 볼 수 있을까. 영화 <벼꽃>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꽃이라면 응당 갖추었어야 할 꽃잎과 꽃받침도 없고, 피어있는 동안에는 그 흔한 벌과 나비조차 날아들지 않는다. 제대로 갖추지 못해 초라하고, 자연 속 다른 존재들로부터 관심받지 못하는 가년스러운 꽃.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밥을 먹는다. 벼가 힘들게 밀어올린 이삭일지라도 벼꽃이 수정 돼야 비로소 낟알이 된다. 초라한 생김 자체가 어쩌면 꽃을 피워내기 위한 기운까지 모아 씨앗을 남기려 한 벼꽃의 선택이 아닐까.
여기 벼꽃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땅과 눈을 맞추고 살기에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 그 자체를 건네는 생산자가 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을 담아내기 위해 자기 또한 무릎을 굽힌 채 살아가는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도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벼꽃>의 감독으로 몇 해 전 괴산에 내려가 한살림 생산자들과 어울려 살며, 우리 농업을 담고자 하는 오정훈 감독을 만났다.

“어떤 일을 3개월 이상 해본 적이 없어요. 쉽게 지루해하는 편인데 영화는 아니었죠. 결과물이 남들 보기 창피해도,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맥이 살짝 빠졌다.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에서 갖는 무게감이 적지 않은 그에게서 ‘사명감’, ‘책임감’, ‘시대정신’ 같은 거창한 단어를 바랐던 것일까. ‘독립영화, 그것도 다큐멘터리 장르를 하게 된 이유’를 묻는 말에 ‘재미’를 이야기하는 오정훈 감독의 대답은 경쾌했고 그래서 오히려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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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사건과 만남이 영화가 된다

그가 감독으로 첫발을 내딛게 한 기폭제는 현실에서 마주한 ‘사건’이었다. 그의 첫 영화는 경찰의 강경진압에 희생된 故 강경대 열사를 다룬 <약속 하나 있어야겠습니다(1995)>였다. “시위 현장에서 학생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날 밤 카메라를 들고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지냈어요. 4년이 지난 후 당시 찍었던 영상과 다른 소스들을 모아 탄생한 영화예요.”
그의 영화는 <벼꽃(2017)>까지 총 7편. 30년 넘게 걸어온 여정을 생각하면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저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다.
박노해 시인의 삶을 담은 <세발 까마귀(1997)>,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을 담은 <낙선(2000)>, 호주제의 문제점을 다룬 <호주제 폐지, 평등 가족으로 가는 길(2001)>,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담론을 담은 <새로운 학교, 학생인권 이등변삼각형의 빗변 길이는?(2011)>, 다문화 다국적 노래단 ‘몽땅’을 이야기한 <나는 노래하고 싶어(2012)> 등. 대부분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시작했다기보다는 일상의 사건과 만남 속에서 인연의 줄기가 자연스레 닿아 찍게 됐다. “처한 환경과 삶의 조건에 따라 영화의 주제가 달라졌던 것 같아요. 제가 혼자 살고 더 자유로웠으면 분쟁이 있는 곳에 갔을 것 같아요. 파인텍 고공농성 현장이라든지,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투쟁이라든지.”
파주 천지보은공동체 이원경 생산자의 벼농사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벼꽃>을 찍게 된 것도 한살림고양파주에서 활동했던 아내를 통해 이어진 만남 덕분이다. 그 만남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그와 가족을 괴산으로 이끌었다. “한살림괴산생산자연합회와의 도농교류를 통해 만난 생산자가 많았어요. 산도 좋고 마을 정서도 맞는 것 같아서 부담 없이 내려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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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그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이야기

묵직한 사회문제부터 별거 아닌 일상의 한 장면까지, 다루지 않는 소재가 없어 보이는 독립 다큐멘터리에서도 농업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먹을거리 문제이자 어느 곳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임에도 정작 농업을 소재로 한 영화는 최근 몇 년간 손에 꼽을 정도다. 이쯤 되니 오정훈 감독이 농업 현실과 생산자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괴산으로 향한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농사를 지어볼까도 생각했지만 한살림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서 그동안 진득하게 해왔던 일을 여기서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사짓는 사람의 대변자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보려 해요. 땅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다룰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그는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토박이씨앗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괴산 우리씨앗농장에 다녀왔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며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시장의 질서에 휘둘리지 않고 콘텐츠 생산의 주체로서 관객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종자 또한 그러한 문제 의식과 맞닿아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기 농사에서 자유롭지 않고 어떻게 자유로운 농부라 할 수 있겠느냐’라는 안상희 생산자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생산해 누군가에게 보내는 일련의 과정이 자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맥락으로 이해했어요. 대부분 종자를 사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종자회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오정훈 감독은 우리씨앗농장을 중심으로 토박이씨앗을 심고 나누는 생산자들과 그것을 받아 텃밭과 가정에서 심는 소비자가 대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그려낼 계획이다. “GMO나 종자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논증적으로 파헤치고, 투쟁하는 이들을 중심에 두는 방식도 있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현실 속에서 대안을 만들어내는 종자운동을 그려보려고 해요. 운동에는 여러 방식이 있고 영화도 마찬가지이니까요.”
생각해보면 <벼꽃>도 그랬다. 땅을 갈고, 거름을 주고, 논물 대는 생산자와 싹을 틔우고, 이삭을 패고, 잘려나가는 벼의 생애를 가만히 따라갔을 뿐인데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고 팍팍한 농업현실을 고민하게 했다. 그가 새로 만드는 영화도 마찬가지리라. 우리씨앗농장과 토박이씨앗을 둘러싼 우리네 이야기를 보다 보면 어느덧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서 어떤 일에 동참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리라. 한살림이 지난 30년간 말 걸었던 바로 그 방식대로.

글·사진 김현준 편집부